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책 [비둘기_파트리크 쥐스킨트] | 거듭된 상실로 인한 인간불신과 소유에의 집착

by 책읽는오제 2024. 12. 5.

*줄거리 포함*

비둘기

 
최근 읽은 책들 중에서 가장 인상이 강렬하게 남은 책이다. '비둘기'라는 소재로 시작하는 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집 현관 앞에 나타난 비둘기에 놀라 자살하려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이렇게만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인물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납득이 가기 시작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조나단은 은행의 경비원으로 일하는 중년의 독신 남성이다. 유년 및 청년 시절의 거듭된 상실의 경험으로 그는 마음의 문을 닫고 월세방에 자신의 모든 애착을 쏟으며 인간을 불신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고집스럽게까지 느껴지는데, 일터에서도 그는 경비를 서며 한시도 앉지 않는 원칙주의적이고 강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삶에 침범한 비둘기는 단순 공포 그 이상이었다. 인간을 불신하는 그는 다른 누군가가 비둘기를 쫓아내고 깃털과 똥을 치워주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애착을 쏟았던 그의 방은 비둘기 때문에 출입이 힘들어졌고, 일터에서도 거듭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그의 혼란과 절망은 심화되었다. 그의 일상에 생긴 균열은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크기였고, 급기야 그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게 된다. 자살을 결심한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렇게 갑자기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살을 결심하고 실천에 이르는 시간이 10분 남짓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자살결심 전에는 죽음에 대한 무수한 고민이 있다. 조나단이 이전에 과거의 상처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자신의 방을 소유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하루만의 자살결심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사실 하루가 아니라, 몇 달에 걸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바꿔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로 일상이 파괴되고, 그래서 절망이 심화되어 버티기 힘들 때 죽음을 생각한다. 최초의 원인은 누구에게나 충격적인 일부터 누구에게는 별거 아닌 일까지 다양하다.


자살결심을 한 조나단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죽기로 한다. 잠에 들었다 새벽에 깬 조나단은 자신이 어떤 상황이고 어디에 와 있는지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이 어린 시절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도움을 구하며 절규한다. 잠시 후 밖의 빗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집으로 돌아간다. 비를 맞으면서 물웅덩이를 마구 밟으며 뛰어간다. 그리고 도착한 집에서 방문 앞의 비둘기 똥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로카르 부인(주택 관리인)이 그의 부탁을 이행한 것이다.
 
그는 왜 죽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봤다.
먼저, 그는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서 겪었던 상처를 다시 대면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던 경험이 자신에게 더 이상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의 과거 극복은 그가 집에 돌아갈 때 어머니가 죽었던 날처럼 비를 맞으며 물웅덩이를 밟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착각 속에서 도와달라는 절규를 함으로써 자신도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수 있다. 애초에 그는 옷 수선을 맡길 때도, 비둘기 흔적을 치워달라는 부탁을 할 때도 남의 도움이 필요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불신이 너무 심해서 상대방의 말과 의도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그가 그 새벽 침대에서 느낀 간절함이 그의 인간불신을 조금 흔들리게 했다면, 집에 도착해서 발견한 깨끗한 복도가 그가 더이상 고립되기만 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나는 조나단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작은 트라우마가 있었고, 그걸 몇 년을 잊고 지냈다. 아마 억압의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책에서 우연히 내 트라우마와 비슷한 상황을 보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이 찾아왔고,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무의식으로 그 경험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흔적이 남았나 보다. 그 여파로 우울증이 왔다.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한동안 그 기억이 주요 원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자살충동과 싸웠다. 사실 제대로 된 원인분석이 가능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인지능력이 회복이 됐을 때 비로소 그 기억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관련 정보를 찾아봤고, 기억을 정리했다. 내가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후로 바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 데다 회피와 강박성향이 다소 있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이 이야기가 정말 현실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다소 황당하다고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주인공의 입장에 몰입하게 되고, 주인공의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왜곡된 시선에 놀라 잠시 거리를 두게 되었다가도 다시 응원하게 만든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강렬한 느낌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난 지금은 강렬함 속에서 발견한 현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