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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책 [평균율 연습_김유진] | 여름 아침, 창 밖 바다의 안개를 보는 것 같은

by 책읽는오제 2025. 3. 30.
 
평균율 연습
우아하고 유려한 문장과 독보적인 묘사로 우리의 감각을 깊이 자극하는 소설가 김유진이 『숨은 밤』(문학동네, 2011) 이후 13년 만에 두번째 장편소설 『평균율 연습』을 선보인다. 장편소설로는 오랜만이지만 작가는 최근 몇 년간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프란츠, 2017), 피에르 베제르의 『나의 이브 생 로랑에게』(프란츠, 2021), 프랑수아즈 사강의 『엎드리는 개』(안온북스, 2023) 등 왕성한 번역 작업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저자
김유진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24.10.30
순정률은 각각의 화음이 절대적인, 변치 않는 비율을 갖는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만든 장식이다. 이 순정률을 대입해 징검다리식으로 음을 조율하다보면 열한 개의 소리는 완벽할지 몰라도 마지막 음은 귀에 듣기 거북할 만큼 본래 소리에서 크게 어긋나게 된다. 이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일반인의 귀에는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방식이 바로 평균율이다. 열두 개의 건반이 결함을 조금씩 나눠 가졌기 때문에 각각의 화음은 순정률만큼 완벽하진 않지만, 모든 음이 무난히 좋게 들린다.

 
'평균율 연습'이라는 제목이 참 알맞다. 조금씩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관계를 조율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수민은 피아노 조율을 배워가는 동시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조율해 나간다. 어머니와 남편은 순정률 같은 사람들이기에 조율하기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름 아침, 창 밖 바다의 안개를 보는 것 같은 분위기의 소설이다. 묘사가 좋아서 느리게 읽게 된다.

 

나는 음악과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다. 다른 예술 분야와 비교했을 때 유독 그렇다. 물론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음악을 틀어 놓는 편이고, 한동안은 플레이리스트 유튜버 발굴에 열중하다가 내가 직접 영상을 올릴까 고민할 만큼, 음악 감상만큼은 꽤 좋아한다. 문제는 내가 창작자로서의 결격 사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래를 못한다. 악기연주에 소질도 없다. 음치까지는 아니지만 음감이 없다시피 하고, 박치다. 다른 예술 분야에도 딱히 소질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림은 평균 이상이고 글은 독서감상문 쓸 정도는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음악을 소재로 다루는 소설에 끌린다. <피아나 소나타 1987>도 그랬고, <평균율 연습>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내가 실제로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 같다.

 

소설의 내용 대신 몇 개의 문장에 대한 감상을 적어봤다.


수민은 이제 자신에게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아름답게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단어는 다른 사람들, 예를 들면 옆자리에 앉은 풋풋한 커플이나 그보다 어린 사람들의 것일 때만 좋아 보였다. (중략) 문득 수민은 자신을 의자로부터 끌어내는 어떤 힘을 느꼈다. 너무나 부드러워 이것을 힘이라고 불러야 할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미약한, 그러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한 완력을. 그건 수민이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아직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그러나 명백히 추락에 가까운 감각.

 

아직 스물한 살이라 그런가, 이런 감각은 느껴본 적이 없다. 5년 후쯤 보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 같아 일단 적어둔다.


그리고 그날, 말끝에 '하루종일'이라고 덧붙이던 수찬의 진지한 얼굴은 결혼이라는 여정의 맨 앞에 놓여 있는 장면이었다. 꿈속을 헤매는 듯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단단한 인과의 세계를 부수고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줄 것만 같아서.

 

얼마 전, 학교 선배들과의 자리가 있었다. 나이 차가 꽤 나는 선배들도 있는 자리다 보니, 결혼 이야기도 나왔다. 다들 결혼과 자녀계획에 대해 진지했다. 아직 결혼 생각은 없는 나와 동기들, 같은 이십 대 초반의 선배들은 결혼해도 괜찮을 사람과 연애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연애를 많이 한다고 경험이 쌓이는 것도 아니며, 제대로 된 연애는 많이 해봤자 5명이면 30이 넘어간다고. 나야 뭐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입장이라 별 생각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씁쓸하다니, 대체 왜? 생각해 보니 나는 결혼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던 것이다. 결혼은 연애와는 다른 차원의, 나와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가 최종적으로 합일되는, 어떤 의미로는 구원인 무언가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그런 판타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너무 충격이었다.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내가, 결혼 판타지라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오히려 그래서 판타지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부모님의 결혼생활의 현실이 별로였기 때문에, 결혼의 장점을 가까운 현실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판타지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리고 결혼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님의 결혼이 왜 성공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분석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경험이 조금 더 쌓여야 어떤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지금은 '그가 단단한 인과의 세계를 부수고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가줄 것만 같아서'이 문장이 너무 좋다. 나도 이런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 이런 결혼이 현실에서는 불행할 것 같지만.


수민은 하루하루가 신나는 모험으로 이루어진 듯한 선배의 메일을 받을 때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건 성장과는 무관한 감각으로, 수민은 언젠가 국어사전을 보다가 딱 떨어지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 묵은 이끼를 뜻하는 '구태'였다.

 

지금껏 나에게 성장을 강요했던 압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내가 나를 온전히 꾸려나가야 하는 시간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방황하고 있다. 지금 이 경험이 나중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