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계엄령 선포 이후로 몇 주간은 정말 뉴스만 봤다. 드라마나 영화, 예능은 볼 수가 없었다. 5,500원을 주고 산 넷플릭스 이용권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국가적 비상사태에 문화생활은 사치였다. 나는 계속 불안에 떨다가 14일 국회로 갔다. 다행이게도 그날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마음이 안정되고 나서, 영화를 볼 마음이 생겼다. <서울의 봄>은 이미 보았고, <택시운전사>나 <1987>은 정신적으로 타격이 너무 클 것 같아서 포기했다. 그래도 이 시국에 맞는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넷플릭스를 뒤지다가 <국가부도의 날>을 발견했다. 환율의 폭등으로 외환위기가 거론되는 만큼 영화라도 봐서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바로 <국가부도의 날>을 재생했다.
나는 외환위기에 대해 잘 몰랐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IMF 구제금융의 도움을 받아 극복했으며, 그 과정에서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는, 학교 내신 시험에 필요한 부분만 알고 있었다. 금 모으기 운동이 사실 아름다운 측면만 있지는 않았다는 것, IMF 조치가 과했다는 것 등은 들어만 봤을 뿐 정확한 진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정말 충격을 받았다. 시험만을 위한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2025학년도 수능 한국사를 다 맞았다. 중고등학교 내신에서도 항상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 이 정도면 애국자는 아니어도 매국노는 면하지 않았나, 하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외환위기의 내막을 몰랐고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점수와 평가는, 잘못된 것이 아닐까? 교육과 평가의 방식이 변해야 하지 않을까?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앞으로의 역사를 제대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배운 역사는 너무 간결하다. 결과 중심적이다. 원인에 대해서는 너무 단편적으로 다루고, 사건을 둘러싼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국사 교과서 개정을 두고 매번 논란이 불거질 만큼 현대사가 다사다난하기에 역사 교과서에서 현대사를 자세히 다루기 힘들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제대로 된 현대사 교육이 간절하다. 우리나라만큼 역사와 정치가 긴밀하게 연결된 나라도 없다. 역사를 잘 모르는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어 정치인들의 말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 그리고 정치인들 중에는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잘못된 역사를 배우게 되면 잘못된 가치관을 갖게 되고, 도저히 역사를 배운 한국인이라면 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한국사 시간에 역사를 온전히 다룰 수 없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너무 답답하지만, 한편으로는 문학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4.3 사건을 문학으로 배웠다. 한국사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아 잘 몰랐던 사건을 소설 <순이 삼촌>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제대로 알게 되었다. 특히 <순이 삼촌>을 학교 문학시간에 배운 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다.
한국사는 대체로 정부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면, 문학은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역사교육을 보완하는 훌륭한 매체이다. 이외에도 역사 영화와 시사 방송을 통해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지만, 의무교육 안에서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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