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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심리학

책 [나는 정상인가_사라 채니] | 정상성은 실존하는가?

by 책읽는오제 2025. 1. 21.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다. 우리는 매 순간 불안에 떨며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어쩌면 생존본능이다.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의 생존 확률을 점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비교'하는 방법도 발전했다. 통계학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더 이상 비교군을 주변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게 되었다. 모집단이 커지면서 일대일 비교의 결과보다 전체 집단에서의 개인의 위치가 중요해짐에 따라 집단의 데이터를 분류하는 여러 가지 기준이 개발되었다. 그중 '정상성'은 하고많은 기준들 중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명확하며, 관대하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책 <나는 정상인가>는 이러한 우리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정상성' 개념은 과연 객관적인지, 명확한지, 관대한지에 대해.

우리의 정상성 관념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지닌 욕망과 집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성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한다. 집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늘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해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자라면서 익히게 된 규범이 생각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고 해서 정상성에 대한 신념 그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정상성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신념에 균열 정도는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정상인가
 

 


1. 정상성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인가?

누가 정상이고, 어떤 행동과 어떤 신념이 용인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확대되어 모든 집단과 공동체에까지 적용되기 시작하자 정상성의 역사에서 한층 암울한 장이 펼쳐졌다. 정상성의 역사는 곧 배제의 역사다. 일반적으로 정상성은 계급, 인종, 젠더, 종교적 신념이라는 기준과 함께 작동해 왔다.
이들(과학자들)은 특정 기준은 포함하고 다른 기준은 배제하면서 부유한 서구의 백인 남성을 기초로 소위 과학적 표준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삶과 행위를 측정하는 척도로서의 정상성 개념의 요체는 바로 이 19세기 과학자들의 사상과 방법론에서 비롯되었다.


'정상성'이라는 개념은 '부유한 서구의 백인 남성'이라는 인류 중 가장 높은 강자성을 가진 집단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 결과이다. 따라서 기준의 적용 대상이 그 집단을 넘어서는 순간 객관성과 보편성을 잃는다.
그런데도 여성, 타 인종, 노동자 계층에 대한 인권 신장이 이루어진 현재에도 아직 19세기에 만들어진 기준들이 그대로 쓰이고 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정상성 측정 기준이 그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것은, 평가의 주체는 항상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일까.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도 결국 변화된 기준은 평가 대상이 아닌, 평가의 주체인 새로운 기득권층의 가치관을 반영할 뿐이다.
 


 

2. 정상성 기준은 명확한가


어떤 정상성 기준은 명확하다. 예를 들어, 암인지 정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악성종양의 여부이다.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런데 어떤 기준은 전혀 명확하지 않다.

우울증이 낫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하루아침에 우울증 환자에서 정상이 되는 사람은 없다.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정상 범주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나는 거진 2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천천히 회복했다. 대체로 오늘이 어제보다 나은 하루하루였다. '이 정도면 다 나았나?' 하고 생각했던 날도 한 달만 지나면 '그땐 정상이 아니었지'로 평가가 바뀌었다. 나는 약간의 출렁거림을 동반한, 길고 완만한 우상향 그래프를 그렸다. 언제부터 수면 위에 있는 시간이 충분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책을 처음 검색했던 때는 나의 우상향 그래프가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기였다. 이제 정말로 다 괜찮아진 것 같으면서도, 드라마틱한 변화의 순간이 없었기에 확신을 가지기 힘들었다. '정상성'에 대해 그때 처음 의문을 갖게 된 것 같다.

결론적으로, 나는 책에서 꽤 멋진 답을 들었다.

또한 정신 질환이 한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온전한 정신으로도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정신이상 상태에서도 확실히 정상적인 행동(그것이 뭘 의미하든)을 할 수 있다. (중략) "온전한 정신의 소유자인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든 우리가 설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해 너그럽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아지는 과정에서 가끔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순간에 나는 내가 설정한 한계를 넘지 않았다. 내가 전에 경험한 밑바닥을 다시 찍는 일은 없었다. 무척 예민했고 그래서 꽤 많은 것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우선순위였던 공부를 비롯한 몇몇 측면은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 당시의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잘 모르지만,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수준은 되었던 것 같다.


 

3. 정상성은 관대한가


한 가지 항목에서 통계적으로 '정상'인 사람은 절대다수이다. 평균과 상위 몇 퍼센트라는 기준보다는 훨씬 통과하기 쉽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비정상'은 낙인이 될 수밖에 없다. '정상'이라는 기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극소수의 '비정상'들에게는 잔인하기 짝이 없다. '정상'의 비율이 늘어날수록 '비정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줄어들고, 혐오하기는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비정상이다. 모든 항목에서 정상인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운이 좋게도 우리의 비정상적인 부분이 크게 문제가 안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잘못이라곤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인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자들을 인정하는 데 반발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이 양지에서 거리낌없이 발언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올바른 사회적 감수성을 자신 다수의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