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순정만화 사랑은 정말 대단했다. 책에서 자세하게 서술된 작품만 수십 개, 간단하게 언급만 된 작품까지 합하면 수백 개가 된다. 작가의 어린 시절 순정만화들이 대부분 장편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양임이 분명하다.
사실 나는 순정만화를 잘 모른다. 부모님의 교육방침 중에는 만화를 배척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고, 나는 꽤나 순종적인 아이였다.
어릴 때 본 애니메이션이라곤 일곱 살 때까지 본 '뽀로로'밖에 없다. 그 흔한 '꿈빛 파티시엘'이나 '아이엠스타', '명탐정 코난'조차 컬러링북으로만 접한 기억뿐이다.
초등학생시절, 나에게 만화란 '내일은 실험왕', '수학도둑', 'WHY?' 시리즈로 대표되는 학습만화가 전부였다. 그것도 시립 도서관에서 하루에 한 권 허락받고 보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몰래 점심시간에 보는 식이었다.
하지만 통제는 영원할 수 없는 법.
내가 인터넷을 이용하기 시작한 2017년 즈음 이미 만화계는 웹툰이 출판만화와의 세대교체를 마친 후였다. 나는 카카오페이지와 네이버웹툰, 다음웹툰(현 카카오웹툰)에서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행여 들킬까(결국 들켰다) 앱을 깔지도 못하고 열람기록을 철저하게 지우는(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수고까지 해가며 볼 만큼 당시 나에게 웹툰은 완전히 신세계였다.
최근에 예전에 본 작품들을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에 웹툰 사이트를 뒤진 적이 있다. 최근 4년간은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전의 기록은 다 지워져 있는 부분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네이버웹툰은 연재시기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예전에 본 작품들을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카카오페이지와 카카오웹툰의 경우에는 일일이 기억을 더듬어 찾아봐야 했고, 찾더라도 끝까지 본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엄청난 수고 끝에 2017년부터 현재까지 나의 모든 웹툰 역사를 엑셀로 정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끝까지 다 본 웹툰만 153개, 일정 회차 이상 보다가 하차한 웹툰은 167개이다.(2024.12.05 기준) 책의 저자처럼 만화에 일가견이 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웹툰 좀 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서 할 일이 없는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웹툰을 보고 있어야 할 지금 나는 웹툰을 못 보고 있다. 네이버웹툰의 각종 만행 때문에 불매운동을 두 달째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네이버웹툰 상위 1%를 몇 년간 찍은 이용자였고, 보는 웹툰의 80% 이상이 네이버웹툰에 있는 충성고객이었다. 거의 무료분만 보기는 했지만, 최근 제대로 된 성인의 자격을 얻어 웹툰에 돈을 쓸 자격이 생긴 사람이란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네이버웹툰 출신 작품 4개의 단행본을 구매할 예정이었다. 이런 나의 구매 및 이용 의사를 없애버린 것이 다름 아닌 내 돈을 가져갈 예정이었던 플랫폼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처음에는 네이버웹툰이 사과할 날만 기다렸다. 사과를 제대로 하고 변화된 태도를 보여준다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애초에 업계 1위 플랫폼을 불매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한 달이 훌쩍 넘는 불매운동 기간 동안 네이버웹툰이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러운 것을 넘어 불쾌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 플랫폼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억울할 만큼 화가 났다. 결국 평생 불매할 결심을 하게 되면서 나의 웹툰에 대한 관심 자체가 식게 되었다. 타 플랫폼에도 물론 좋은 작품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보고 있는 작품들도 몇 개 있지만, 불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나의 결심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꽤 큰 부분을 차지한 것이 웹툰이다. 언젠가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한 챕터를 웹툰으로 채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허탈하다.
그렇지만 허탈함과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불매운동으로 나는 기업윤리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웹툰에 대한 관심의 일부가 옮겨온 것 같다. 나는 이 변화가 낯설면서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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